<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의 위대한 시작

개봉일 : 1996년  5월 15일

96년 당시 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최근 다시 봤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새로운 것들이 많이 보인다. 홍상수라는 영화

예술가, 지금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그의 '위대한'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후 홍상수의 영화들을 거의 다 봤지

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정성일이 그랬던가. "봉준호는 갈수록 퇴보한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까지 나온 시점에서 <플란다스의 개>가 가장 뛰어났다고 평하면서 했던 말이다. 홍상수에게 봉준호를

적용하며 갈수록 퇴보한다 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냥 홍상수의 영화들 가운데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가장 뛰

어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홍상수는 비루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초라한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여 줘 불편하기도 하지만 관객이 깊이 공

감하고 키득키득 웃게 하는 영화를 만든다. <오! 수정>에서 김재훈(정보석)은 양수정(이은주)과 섹스를 하면서 말한

다. "수정 씨, 수정 씨 맞죠?", 양수정은 신음하며 대답한다. "네, 저 수정이에요!!" 영화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다. <돼

지가 우물에 빠진 날>도 그렇다. 효섭(김의성)에게 보경(이응경)은 '구원'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집착

한다. 그녀와 섹스하며 효섭이 말한다. "내 거라고 말해줘." 그녀가 답한다. "당신 거에요." 민재(조은숙)는 효섭을 '동

경'한다. 민재에겐 효섭이 전부지만 효섭에게 민재는 잠깐의 도피처일 뿐이다. 자포자기한 민재가 자신을 좋아하는 민

수와 섹스하며 말한다. "내 몸 가지니까 좋니?" 놀란 민수가 "사랑해."라고 말하자 민재는 "내 눈 보면서 (섹스)해."라고

답한다. '살벌'하게 리얼한 장면들이다.

나도 그렇지만 내러티브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홍상수의 영화는 매력이 없다. 아니 어이가 없다. 그런 가운데 그나마

내러티브를 갖춘 영화가 바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리고 <강원도의 힘>이다. 두 작품 모두 훌륭하지만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힘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쪽이 월등하다.

이 영화엔 아이러니에 아이러니가 물려있다. 결벽증이 심한 동우(박진성)는 지저분한 모텔 침대를 보며 "더러운 새끼

들"이라 읊조리지만 곧 여자를 불러 그 침대에서 섹스를 한다. 그런 동우가 자신의 아내 보경의 불륜을 의심한다. 그리

고 효섭은 스스로 보경과 불륜관계에 있지만 그에게 보경은 순수하고 깨끗한 여자이고 민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

럽고 개같은 똥이다. 영화의 마지막, 동우는 보경과 강제로 관계를 가지면서 말한다. "넌 깨끗한 여자야."


이 영화의 원작은 구효서의 <낯선 여름>이라는 소설이다. 96년 당시, 영화를 보고 소설에 호기심이 생겨 곧 소설도 읽

었는데 영화만큼 암울하고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무난하고 색깔이 없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소설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작품을 알아보고 이렇게 변화시키는 걸 보면 홍상수라는 사람, 역시 영화감독은 영화

감독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2011년 현재 대한민국 베스트 송강호다. 최

고의 영화 예술가 홍상수가 이 작품으로 '위대한 탄생'을 알렸다면 송강호 역시 이 작품으로 데뷔하며 대한민국 최고

배우의 시작을 알렸다. 출연자 명단 저 아래 나오는 송강호 이름 석 자가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30살 무렵의 송강

호, 지금보다 많이 앳되 보이지만 연기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짧은 시간 출연에 너

무 과찬인가. 어쨌든 결과가 그렇게 됐으니 표현이 '오버'라 해도 그냥 넘어가련다.     


홍상수, 송강호의 '위대한 시작'을 알린 명작. 지금의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이라도 한 번쯤 볼만한 영화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내러티브와 드라마가 살아있다는 면에서 가장 '대중적'이라 할만 하기에 그렇다. 아직

이 영화를 모르는 영화팬이 있다면 감상을 권한다. 감상 후 영화가 너무 암울해 심란해진 분들은 홍상수의 다른 영화

<해변의 여인>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도로 기분 전환이 가능함을 추가로 알려 드린다.      

 
추가.. 포스팅을 하면서 보니 홍상수 감독이 최근 자신의 13번째 장편 <북촌방향>의 촬영을 마치고 개봉 준비 중이군

요. 이전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는 유준상, 송선미가 주연이고 <강원도의 힘>에 출연했던 백종학도 나옵니다. 특이

한 건 15년 전 그의 데뷔작 주연을 맡았던 김의성이 돌아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홍상수도 그렇고 서로 감회가 새

로웠겠어요. 홍상수의 신작은 물론이고 김의성의 컴백도 나름 화제가 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