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 : 2011년 3월 11일
올해 아카데미는 공교롭게도 시나리오가 짜임새 있고 드라마가 훌륭한 영화들이 전면에 올라왔었다. <파이터>, <킹
스 스피치>, <블랙 스완>, <소셜 네트워크>까지 하나같이 그런 영화들이다. 그러면서 한 인간을 조명한 드라마들이
다. 작년을 보면 전쟁이라는 극한에 던져진 인간을 다룬 <허트 로커>와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말이 필요 없는 <
아바타>가 오스카를 주도했다. 그렇게 보면 올해는 화려하지 않고 소소한 아카데미였던 셈이다.
80년대 최고의 스포츠를 떠올렸을 때 빼 놓을수 없는 게 프로복싱이다. 지금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돌
이켜보면 복싱의 인기는 대단했다. 슈거레이 레너드, 홀리 필드, 레녹스 루이스, 전설의 마이크 타이슨까지 최고의 스
타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또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복싱도 비슷한 인기를
누려 박종팔, 장정구, 유명우 등이 지금도 많은 이의 기억에 '챔피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파이터>를 보며 문
득 그 시절과 우리가 즐겼던 프로복싱이 생각났다. <파이터>는 이제는 '화석'이 되어 사라진 프로복싱과 한 시기를 풍
미한 챔피언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미키 워드와 디키 워드라는 실존 인물들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최대한 실제 그들의 삶에 가깝게
만든 느낌이다. 실화를 배경으로 했어도 감동과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다소의 설정이나 연출이 가미될 수도 있지만 영
화는 그저 덤덤하게 그들의 인생을 그려 나간다. 그래서 반전이라든지 극적인 재미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뭔
가 허전하고 심심할 수 있다.(극단적으로 누구나 복싱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록키>를 얘기할 수 있다. 이런 영
화와 비교하면 <파이터>는 상당히 건조하다.)
<파이터>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음악이다.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즈, 에어로 스미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등. 70,
80년대 팝음악, 대단히 미국적인 그리고 영국적인 팝음악이 영화 곳곳에 흐른다. 마지막 게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음악
은 극을 '밝고 경쾌하게' 끌어간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귀가 상당히 즐거운 영화였는데 마지막 미키와 디키가 경기장
으로 향하는 장면에 나왔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까지 예전 팝음악을 좋아하는 영화팬이라면 음악만으로
만족할 영화이기도 하다. 스코어 선곡이 훌륭하다.
영화는 복싱선수 형제의 삶을 그리면서 동시에 당시 미국 사회 일반의 문제(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도 다루고 있다.
디키는 혼자 아들을 키우고 있고 미키는 이혼 후 혼자 살며 면접권을 통해 정기적으로 딸을 만난다. 미키의 전처는 괄
괄하고 전처의 남편이 오히려 미키를 이해한다. 영화 속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때 잘 나갔던 선수였지
만 이제 퇴물이 된 디키는 마약에 빠져 살고 이런 저런 이유로 20번 넘게 체포된 경험이 있다. 영화에선 경관을 사칭하
다 검거되는 모습이 나온다. 또한 HBO가 '디키 워드의 컴백'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고 해놓고 약속과 달리 '마약에 빠
진' 전직 복싱스타로 프로그램을 만든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언론의 '사기질(fraud)'
아니던가.
하나하나 보면 <파이터>는 정말 아카데미 스타일의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한 인간의 성공담, 러브 스토리와
가족 간의 이야기가 함께 담긴 드라마. 탄탄한 시나리오에 걸출한 주연배우. 그럼에도 올해는 <킹스 스피치>가 홀로
잔치를 하는 통에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 작년 <허트로커>를 만난 <아바타>처럼 상대를 잘못 만난 탓이다. 아닌 말로
남우주연상을 콜린 퍼스가 아니라 크리스찬 베일이 수상한다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고 감독상을 데이빗 O.
러셀 또는 데이빗 핀쳐가 수상해도 문제될 게 없는 아카데미였다.
배우와 감독.. 크리스찬 베일의 정점은 <다크 나이트> 보면 되지 싶다. 2008년 최고의 조커와 함께 브루스 웨인을 연
기한 그는 2009년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너미>에서 조니 뎁이라는 슈퍼 스타와 호흡을 맞췄고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
던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에서는 존 코너를 연기했다. <파이터>로 모든 언론의 찬사를 받은 그는 2012년
다시 한번 크리스토퍼 놀란과 함께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준비한다. 히스 레저는 없지만 어떤 배트맨으로 돌아올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마크 월버그를 생각하면 <혹성탈출>이 먼저 떠오르고 2007년 작품 <위 오운 더 나잇>, 그리고 피터 잭슨의 기이한 <
러블리 본즈>가 이어진다. 마크 월버그는 미국 내 입지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감독 데이빗 O. 러셀은 이 작품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 데이빗 핀쳐,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그의 이전 작품 중에 눈에 띄는 건 조지 클루니, 마크 월버그와 함께 했던 99년 영화 <쓰리 킹즈> 정도다.
차기작은 2013년 다시 마크 월버그와 함께 하는 <언차티드:드레이크 포춘>이다. 그가 어떤 작품으로 돌아올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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