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 : 2012년 10월 11일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는 유명한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미 수차례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내용과 극의 매력을 이미 많은 관객이 알고 있기에 이와 같은 작품을 리메이크 할 때는 어지간히 잘 만들지 못하면 어필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내 경우 허진호의 팬이기도 하기에 이 작품을 보기 전에 아니 오래 전 제작에 관한 뉴스를 접한 후부터 꽤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외출>과 같은 망작도 있었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같은 작품으로 자신만의 멜로 세계를 구축한 허진호는 누가 뭐래도 한국 멜로영화의 대표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유가 뭘까.'하는 생각이 든다. <위험한 관계>라는 작품 자체가 갖는 드라마적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허진호만의 영화적 스타일이 추가된 것도 아니다. 하긴 바꿔 넣은 결말이 허진호식 해석이라면 그렇게 볼수도 있겠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연히 이전 <위험한 관계>들과 영화 속 인물들이 오버랩된다. 여러 편의 <위험한 관계> 가운데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은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1988년 작품인데 극의 흐름 뿐 아니라 배우들의 매력까지 스티븐 프리어즈의 영화가 허진호의 상하이 버전을 완벽하게 압도한다. 존 말코비치, 글렌 클로즈, 미셸 파이퍼와 같은 최고의 배우들이 함께 한 영화다.
한겨레TV의 <크랭크인>에서 오동진과 허진호 감독은 영화의 배경을 1930년대 상하이로 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화하는데 영화를 보며 동의하기 어려웠다. 세트 제작비와 의상을 만드는 비용으로 수십억원을 들였다는데 영화의 완성도를 보면 역시 제작비와 완성도, 영화적 재미는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다. 특별히 시대가 1930년대이기에 일본에 저항하는 중국 청년들도 묘사되는데 영화의 흐름과 무관한 부분이다. 허진호 감독은 장동건의 중국어 연기를 칭찬했는데 영화에서 유일하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더빙 없이 현장에서 직접 연기했다는 장동건의 중국어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은 셰이판(장동건), 모지웨이(장백지), 장쯔이(뚜펀위)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이들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베이베이와 그의 미술교사 따이원조다. 존 말코비치의 <위험한 관계>에서 우마 서먼과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한 인물들이다. 그 작품에선 이들이 극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시종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 관계는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에도 그대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이소연과 조현재가 그 역할을 맡았다. 이재용 감독 역시 이 인물들에 비중을 실어 극의 재미를 더했다. 그런데 허진호는 이 인물들의 역할을 들어냈다. 영화 속에서 베이베이와 따이원조를 보면서 저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이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베이베이의 캐스팅을 보고 예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허진호는 그저 주인공 3인의 관계로 영화를 끌어갔다. 어찌보면 베이베이와 따이원조의 역할을 완전히 뺀 것이 이 작품에 허진호가 확실하게 넣은 자기만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에서 키아누 리브스, 조현재의 역할과 특별히 복수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따이원조의 역할은 심심하고 마지막 복수는 허탈하다.
허진호의 <위험한 관계>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보면 나쁘지 않다. 3인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밋밋하지만 무난하게 흘러가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신파 드라마다. 하지만 훌륭한 전작을 리메이크했기에 그와 비교는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 무언가 다른 터치가 있어야 할텐데 허진호 감독은 그 부분에서 그 무언가를 만들지 못한 것 같다. 여러가지로 아쉽고 심심한 <위험한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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