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 : 2012년 5월 17일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은 일찌감치 홍보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개봉 한 달 여 전부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임상수는 안 된다."며 "임상수의 영화는 볼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나에게는 임상수라는 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다. 그리고 <돈의 맛>이 칸에 초청받았다는 소식이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적잖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돈의 맛>은 세계 유수의 미디어로부터 영화제 참가작 가운데 최하의 점수를 받았고 어떤 상도 수상하지 못했으며 임상수 감독은 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사실 <돈의 맛>은 상당히 아쉬운 영화다. 이 영화를 <하녀 2>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김강우는 전도연의 또 다른 버전"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로 수긍이 가는 얘기들이다. <돈의 맛>의 예고편은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고를 보고 기대한 관객은 소위 '낚인' 셈이다. 예고에서 보여주는 게 전부인 영화가 <돈의 맛>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강렬하다. 윤회장(백윤식)은 아들을 빼내기 위해 검찰 간부에게 거액의 뇌물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1만원, 5만원권이 가득한 그들의 비밀금고가 관객 앞에 보여진다. 산더미처럼 쌓인 현금은 영화 초반 관객의 시선을 끈다. 돈으로 검찰을 매수하는 장면도 이후 드라마 전개를 기대하게 하는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영화는 이후 딱히 '돈의 맛'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저 재벌가 사람들의 성생활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감독은 특히 난교에 집중하며 재벌의 난잡한 성생활에 포인트를 두는데 이런 묘사는 극에 힘을 넣지 못하고 드라마는 지리하게 흘러간다. 윤회장은 "더 이상 모욕적인 삶은 살지 않겠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에바(마우이 테일러)를 선택하고 그의 부인 백금옥(윤여정) 역시 순간적인 욕정에 이끌려 집사 주실장(김강우)과 관계를 갖는다. 이후 이들 부부의 딸 윤나미(김효진) 또한 주실장과 관계를 가지면서 영화는 <돈의 맛>보다는 <바람난 가족>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흘러간다.
영화는 아주 단순하다. 모두 관객이 예상 가능한 수순으로 진행된다. 임상수가 뭔가 준비한 게 있을거라 생각한 관객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임상수는 '돈의 맛'에 취해 살아가는 한국 상류사회를 풍자하려 했을텐데 영화를 보면 과연 <돈의 맛>이라는 제목이 적절한가 싶다. 극중 누가 '돈의 맛'에 취해 사는지 모를 일이다. 두 번 정도 (사실상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주실장이 자신의 방에서 거울 뒤에 숨겨둔 돈 뭉치들을 만지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두고 그가 그들이 주는 돈의 맛 때문에 그 집안을 떠나지 못한다고 보기도 그렇다. 오히려 '돈의 맛'에 정신 못차리는 인물들은 극중 백금옥의 대사에 나오는 (정작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정치인, 판사, 검사, 교수, 공무원, 기자나부랭이들'이다. 영화의 주인공 윤회장, 백금옥, 윤나미, 주영작은 '돈'과는 상관없는 치정극을 만들어간다.
영화의 미장센은 훌륭하다. 호화로운 집안에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하지만 이야기는 빈약하다. 취향의 차이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앙상한 드라마가 초라하게 느껴진 영화였다. 그저 이미지만 남는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이 너무 많다. 임상수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구체적인 대사로 전달한다. 맥락과 상황이라는 고급스런 방법은 없다. 특히 '모욕'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입에 올리는 윤회장의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관객의 수준을 대단히 낮게 본 셈이다. 아니 그 방법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16억으로 수백조에 달하는 그룹 전체를 물려받은 삼성의 후계자에 대한 묘사라든지 장자연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 인상적이지 못하다.
임상수는 위트라면 위트라 할 수 있는 장난 섞인 연출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주실장이 윤회장의 아들 철(온주완)과 주먹 다짐을 하는 장면. 철은 사과를 하면서 가볍게 주먹 몇 번을 휘둘러 주실장을 제압한다. 나름대로 진지한 분위기를 이어오던 드라마 가운데 그럭저럭 극에 집중하던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장면이다. 엉뚱한 장면은 영화 마지막에도 나온다. 죽은 사람이 눈을 뜨는 장면이다. "돈은 죽은 자도 눈뜨게 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엉뚱하게 느껴졌다. 임상수가 '박찬욱 따라하기'를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은교>가 박해일의 성기노출, 김고은의 음모노출로 '낚시'를 했다면 <돈의 맛>은 김효진의 노출을 상당 부분 마케팅에 이용했다. 김효진 역시 "유지태가 격려했다."며 낚시질에 적극 가담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 볼만한 부분은 '노출'이다. <돈의 맛>은 <하녀>와 동일하게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 재미있는 건 카메라 밖에서의 계급, 스타와 무명배우라는 또 다른 계급이다. 영화 속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과감히 노출하는 배우들은 에바를 연기하는 마우이 테일러, 그리고 난교 장면에 등장하는 무명의 외국 배우들 뿐이다. '인기'라는 권력을 가진 김효진 같은 배우는 몸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임상수가 의도적으로 이를 통해 계급을 비판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최근작 <은교>에서도 볼 수 있다. 은교 역을 맡은 김고은은 가슴은 물론 음모까지 노출하며 열연했다. 이름 있는 여배우를 캐스팅해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따라서 영화 속 노출은 이름 없는, 인기 없는, 권력 없는 여배우들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여배우들 사이에서 계급은 그런 모양으로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과거 영화 속에서는 최명길, 진희경, 전도연 그리고 배두나와 같은 이름있는 배우들이 과감하게 노출하며 작품에 몸을 던졌다. 오히려 10년, 20년 이전의 영화에서는 그랬다. 배우들의 마인드, 작품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그랬다.(요즘 영화에서 여배우들이 노출을 꺼리는 이유로 노출연기를 했을 때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리있는 분석이다.)
<돈의 맛>은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특히 백윤식, 윤여정과 같은 매력있는 노장 배우들을 기용해 이 정도 밖에 보여주지 못했기에 아쉽다. 개인적으로 더욱 황당했던 건 이 작품으로 임상수가 칸에서의 수상을 기대했다는 사실이다. 수상에 실패한 직후 임상수가 많이 안타까워했다는 뉴스를 보며 '언감생심, 꿈도 야무지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쪼록 다음 작품은 <돈의 맛>에서 조금이라도 전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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