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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eview

<은교> 박범신, 정지우가 그린 오욕칠정의 세계



개봉일 : 2012년  4월 26일



<은교> 개봉 직후 관람한 한 여성은 나에게 "영화가 지루하다."고 했다. "파격적인 성애(볼거리)를 기대하고 영화를 관람했으면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대답했다. 얼마 전 <은교>를 본 한 남성은 나에게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그 생각을 한다더니 과연..."이라 말하며 웃었다. 이렇게 <은교>를 관람하는 다수의 관객은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성애라는 파격적인 소재, 그 묘사 수위에 호기심을 갖고 극장에 들어섰다. 


나 역시 <은교>의 대략적인 내용을 보며 <로리타>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소재가 상당히 자극적이긴 하다. 영화를 관람한 후에는 이들이 영화를 홍보하며 성적인 내용을 강조한 부분이 아쉬웠다. "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 서로를 탐하다."라는 문구가 영화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탐하던가. 물론 마케팅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랬으리라 추측할 수 있지만 영화를 괜찮게 본 관객 입장에서 박해일의 성기노출이라든지 파격적인 정사를 강조한 마케팅은 씁쓸했다. 





나도 그렇지만 한국의 현대문학에 관심있는 관객이라면 이적요 시인(박해일)과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를 두고 벌어지는 한국 문단, 출판계의 묘사가 재미있다. 서지우의 소설 <심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1위를 질주하며 인기몰이를 한다. 老 시인이자 한국 문단의 어른 이적요의 수발을 들던 젊은 작가는 그렇게 베스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하지만 서지우는 자신이 쓰지 않은 작품으로 얻은 부와 명예이기에 하루하루를 불안하고 예민한 모습으로 버텨낸다. 은교(김고은)와의 대화 중에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천박한 통속소설'이라 칭하는 부분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장면이다. 서지우는 <심장>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당연히 그 작품에 애정이 없다. 하지만 서지우의 욕심은 끝이 없고 결국 스승의 <은교>라는 단편까지 훔쳐 이상문학상까지 거머쥐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한국 문학계, 출판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한국 현대문학에 관심이 있고 이상문학상이라든지 동인문학상과 같은 (문단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상을 수상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보다 다양한 부분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은교>다.        





어떤 기자는 이 영화에 낮은 평점을 주면서 그 이유로 "<은교>에서는 이적요만이 살아있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서지우와 은교는 타자라는 설명이었다. 특히 은교의 행동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며 점수를 깎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적요만이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이야기할만한 부분이다. 정지우 감독 또한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은 은교가 '나는'이라고 말하는 작품이 아니라 이적요가 '은교는'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박범신 작가 역시 "은교는 판타지"라고 말했다. 

영화를 본 후 나는 은교는 '객체'로 볼 수 있지만 서지우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에서 서지우는 분명히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는 그리고 (파렴치하긴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가장 감정이입할 수 있는) 고뇌하는 인물이다. 비록 "(하늘의 모든) 별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둔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긴 해도 그는 영화 속에서 "나는"이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사실 이 작품은 '공대생'을 비현실적으로 감수성이 둔한 (거의 바보에 가까운) '놈'으로 묘사한다. "손거울이 다 같은 거 아니냐."고 말하는 서지우가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이해할 리 만무다. 덕분에 관객은 여러 차례 웃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이적요와 은교의 섹스, 서지우와 은교에 섹스, 은교의 음모 노출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리고 "무슨 여고생이 그렇게 능숙하게 하느냐."는 사람들을 보며 박범신이나 정지우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그런게 아닐텐데 생각도 했다. 그런데 박범신은 강연에서 '오욕칠정'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바람직하게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독자들을 어떻게 수렁속으로 빠트릴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 쓴 작품)"라고 말한다. <은교>의 원작자 박범신의 의도는 그랬다. 내가 핵심을 잘못 짚었다. 영화를 보고 한 달 여의 시간이 지났다. 영화를 본 직후 소설 <은교>를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 박범신이 말하는 '오욕칠정'에 빠질 수 있을까. 소설 <은교>가 영화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라는 말이 많다. 조만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