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하면서 화제를 모은 마지막 작품 <아이즈 와이드 셧>이 혹평을 받으며 영화인생의
마무리가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영화 가운데 1980년 작품 <샤이닝>이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인 작품으로 공포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교단에서 떠난 잭(잭 니콜슨)은 콜로라도 록키에 있는 오버룩 호텔의 관리인으로 취직을 한다. 아내 웬디, 아들 대니와 함께 호텔에 머물며 한겨울 폐쇄되는 기간에 호텔을 관리하는 일이 그의 업무다. 그런데 그 호텔에는 과거 살인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현재의 잭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가족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내용이 영화의 줄기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광기'를 표출하는 잭 니콜슨의 명연기다. 40대 초반의 잭 니콜슨은 일찌감치 대배우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지난 1월 우디 앨런 감독이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숀 펜, 잭 니콜슨 가운데 누가 최고의 배우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 파치노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카페이스가 뭐가 그렇게 좋냐."며 "잭 니콜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배우"라 평가하는 인터뷰가 보도됐다. 알 파치노에 대한 평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잭 니콜슨에 대한 발언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연기를 잭 니콜슨은 <샤이닝>에서 보여준다.
<샤이닝>을 말하면 잭 니콜슨의 '광기'가 상징처럼 거론되지만 사실 <샤이닝>는 '광기'보다는 '정신병'에 관한 영화다. 영화 초반, 아들 대니가 토니라는 상상 속의 친구와 대화하는 모습부터가 심상치 않다. 후반부로 가면 아내인 웬디 또한 환각에 빠진다. 모두가 미쳐간다. 무엇보다 압권은 잭의 증상이다. <샤이닝>을 보고 있으면 이후 나온 정신병에 관한 영화들이 일정 부분 <샤이닝>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드림 하우스>라든지 <셔터 아일랜드>가 그렇다. 잭 니콜슨이 미쳐가는 모습, 정확히 말하면 이미 정신적으로 병든 모습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가족 외에 주목하게 되는 인물들이 있다. 하나는 딕 할로랜이라는 요리사다. 할로랜과 대니와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샤이닝'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된다. 그와 대비되는 지점에 웨이터 델버트 그래디가 있다. 관객에게 영화에 관한 힌트를 주는 인물이면서 잭이 가진 또 다른 자아의 역할을 한다. 영화를 보면서 쉽게 지나치는 이름이지만 몇몇 이름과 영화 속에서 밝혀지는 시간적 배경을 기억하면 영화 막판에 이르러 모골이 송연해진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이미지가 많이 사용되었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두 소녀의 이미지는 수차례 대니의 눈 앞에 나타나고 피가 계곡물처럼 복도를 흐르는 이미지 또한 등장인물의 환각을 보여주는 시각적으로 뛰어난 이미지다. 영화는 또한 뛰어난 색감을 자랑한다. 주방이라든지 복도, 화장실 등에서 흰색, 녹색, 붉은색이 각각 그리고 때로 혼합되어 쓰이면서 장면 장면의 기이한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스탠리 큐브릭이 처음 사용했다는 스테디캠 샷은 워낙 유명한 장면이다. 대니가 호텔 복도에서 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따라가던 스테디캠은 영화 마지막 눈 덮인 녹색 울타리에서 그대로 보여진다. 도망가는 대니와 이를 쫓는 잭, 두 사람을 교대로 보여주는 스테디캠은 영화사에 남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샤이닝>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아니 문장을 꼽자면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놀지 않고 일만 하면 잭은 바보가 된다.)"가 있다. 잭의 수백장 원고를 가득 채운 이 하나의 문장은 관객에게 잭의 상태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영화 속에서 잭은 학교를 떠나 호텔 관리인이 되는 인물이다. 만약 영화에서 아내 웬디가 가장으로의 역할 문제로 잭을 닥달하는 모습이 있었다면 잭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 초반 호텔의 책임자 얼만이 '고립'과 '고독'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잭의 '광기'를 설명할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면 잭의 '광기'에는 이유가 없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샤이닝>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가운데 <풀 메탈자켓>과 더불어 가장 재미있는 영화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아 아쉽지만 대가의 작품을 가끔씩 다시 보는 것, 꽤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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