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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eview

<베를린> 한국형 첩보액션의 화려한 출발



개봉일 : 2013년  1월 30일



사실상 첩보액션이라는 장르가 없는 한국영화에서 어떤 구도로 진영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갈지 궁금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대략의 구도가 드러난다. 한국의 국정원, 아랍의 테러조직,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미국의 CIA, 그리고 북한이 엮이면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김정은으로 권력체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북한 내 권력투쟁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줄기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독일 베를린이지만 북한 내 암투가 주요 소재이기에 특별히 한국 관객이 몰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권력자간의 암투, 배신, 첩보원 간의 싸움, 그리고 인간적 갈등까지 이야기의 소재와 전개는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상투적인 대사들로 시간을 채우지 않고 늘어지지 않는 스피디한 전개는 관객이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연합뉴스를 비롯한 북한 전문가, 

암호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작업한 시나리오는 북한이라는 소재를 사실적이면서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작품 안에 녹여넣었다. 





영화를 보고 <본 시리즈>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007 시리즈>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좁은 공간에서의 액션이나 계단에서 연출되는 액션을 보면 당연히 <본 시리즈>가 떠오른다. 하지만 <본 시리즈> 이후 어지간한 첩보액션은 <본 시리즈>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하면 이건 흠이라 할 수 없다. 맷 데이먼이 수건이나 잡지, 두꺼운 책을 액션에 사용하듯 <베를린>에서 하정우는 통조림 캔과 가위를 이용한 액션을 보여준다. 자신의 집에서 창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에는 명백하게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의 기시감이 있다. 떨어지는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와 전깃줄이 표종성(하정우)의 다리를 휘감아 공중에 매달리는 장면은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액션 디자인은 단순히 모방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오랜 세월 류승완의 단짝으로 함께 일하는 정두홍 무술감독의 역할도 크겠지만 최동훈 감독과 여러 작품 함께 해 온 최영환 촬영감독의 촬영 또한 빛을 발한다. 마지막 부분 안가에서의 총격전, 특히 표종성(하정우)과 동명수(류승범)의 격투 장면에서 세련되고 감각적인 촬영이 돋보인다. 최영환은 김성복이나 김형구라는 촬영감독의 계보를 이어가는 촬영감독이 되고 있다.       





<베를린>은 4명의 공동주연을 내세우고 있지만 하정우의 비중이 단연 크게 느껴진다. <베를린>은 하정우의 드라마다. 하정우는 현재 단연 최고의 남자 배우로 점점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류승범 역시 나무랄데 없이 캐릭터를 소화하며 영화에 힘을 보태고 전지현은 <도둑들>에 이어 자신의 재능을 끌어낼 수 있는 감독을 만남으로 또 한번 흥행작의 주인공이 됐다. 하나 아쉬운 건 한석규다. 정진수라는 인물을 분석하고 소화하기에 한석규라는 배우가 부족할 건 없지만 체격에 비해 큰 트렌치 코트를 입고 힘겹게 뛰어다니는 한석규는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다. 한 시절을 풍미한 명배우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세대교체를 느끼게 된다.


류승완의 영화답게 멋진 대사들도 기억에 남는다. 독일 주재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피할 곳이 없다."라든지 동명수(류승범)의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복수는 마지막에 냉정하게 하는거야.)"와 같은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다. 류승완이 '품앗이'라고 표현한 '감독들의 특별출연'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이 국정원 분석관으로 출연해 적지 않은 대사를 소화하고 <미스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 역시 국정원 요원으로 얼굴을 비친다.





한국영화에 이런 장르가 없기에 이와 같은 영화의 레퍼런스면서 지향점은 당연히 헐리우드 영화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강제규 감독이 떠오르기도 한다. 헐리우드 컴플렉스로 가득차 무작정 크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케일을 앞세워 헐리우드 따라잡기를 한 강제규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마이 웨이>. 평단의 혹평과 관객의 외면을 받고 재앙으로 남은 영화다. 반면 류승완은 높은 수준의 시나리오에 자신의 장기인 스타일리쉬한 액션, 국가와 인간에 대한 시선까지 더해 헐리우드 첩보물의 외형을 빌려온 한국형 첩보액션물을 완성했다. 영화가 끝난 후 불이 켜진 극장에서 관객들의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2013년 초부터 좋은 한국영화를 만났다. 기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