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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alk

<본 레거시>를 보며 도시와 영화에 관해 드는 생각




<본 시리즈>의 팬들에게 <본 레거시>는 기대도 있었지만 우려도 컸던 영화다.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걸작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된 시리즈의 속편이 이 시리즈의 재미와 감동에 흠집을 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영화는 우려했던 것처럼 엉망은 아니다. <본 시리즈>를 기억하는 팬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는 분명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시리즈의 각본을 담당했던 토니 길로이는 괜찮은 수준의 첩보물을 만들어냈다. 


한국 관객에게 <본 레거시>는 다른 면에서 조금 특별하다. 작년 여름 <본 레거시>의 제작진이 한국을 방문했고 강남에서 작품의 일부를 촬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관객을 한편으로 기대하게 했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았듯 <본 시리즈>는 영국, 독일, 스페인과 같은 유럽 국가 뿐 아니라 인도, 모로코까지 영상에 담아내며 볼거리를 제공했다. 자연히 한국, 서울이 어떤 비중으로 어떻게 영화에 담길지 기대가 됐다. 





작품을 본 관객이라면 알겠지만 '낚시'도 이런 '낚시'가 없다. 서울이 <본 레거시>의 배경 도시로 등장했다고 말하기는 민망한 수준이다. 주인공 제레미 러너도 나오지 않으며 시간으로 따지면 1분 남짓한 분량이다. 대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아시아 국가가 있다. 필리핀의 마닐라다. 영화의 후반부 분량이 전부 마닐라 촬영분으로 채워졌다. 영화를 보면서 '서울은 헐리우드 영화를 찍기에 마닐라만큼도 못한 도시구나.' 생각했다. 물론 헐리우드 영화를 국내에서 찍지 않는다고 크게 부끄럽거나 억울할 건 없다. 그냥 그렇다는거다. 한편으로 왜 그런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문득 예전에 <무간도>와 <디파티드>를 비교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글이 떠올랐다. <디파티드>의 완성도를 떠나 <무간도>라는 이야기 자체가 홍콩을 떠나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이야기라는 설명이었다. 홍콩의 분위기, 홍콩의 공기가 영화를 감싸고 있다는 게 정성일의 평이었고 따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도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디파티드>는 <무간도>의 느낌을 낼 수 없다는 평가였다. 굉장히 공감하며 읽은 글이다. <디파티드>는 별개의 작품으로 보면 몰라도 <무간도>를 생각하며 보면 영화적 흥미가 많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도시들은 각각 그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파리는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고풍스런 도시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영국의 런던이나 독일의 베를린 역시 마찬가지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포르투갈의 리스본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 도시들은 세계적으로 인지도만 높을 뿐 아니라 수 백년 역사를 간직한 도시만의 색깔을 그대로 품고 있다. 





작년에 개봉한 <007 스카이폴>의 도입부는 터키의 유서깊은 도시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의 지붕 위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본부에 있는 다른 요원 태너의 대사 가운데 '그랜드 바자(grand bazaar)'라는 이름이 나온다. '바자'는 이스탄불의 역사가 베어있는 재래시장 이름이다. 이 배경이 다른 영화 <테이큰 2>에 동일하게 나온다. 리암 니슨과 매기 그레이스가 뛰어다니던 지붕이 어디서 본듯 했는데 <007 스카이폴>에 나왔던 바로  그 곳이었다. 특히 낡은 기왓장과 특유의 건축양식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그 도시의 '바자'라는 시장은 그렇게 세계 곳곳의 관객에게 친숙하게 알려진다.  


서울에는 서울만의 색깔이 있을까. 부수고 개발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역사적 정취를 남기고 보존하는데는 관심이 없는 게 한국 사람들 아닐까. 그 결과 고유한 색깔이 사라지고 좋게 말하면 '글로벌'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게 현재의 서울이 아닌가 싶다. 헐리우드 영화에 서울 좀 안 나온다고 그렇게 아쉬울 건 없다. 그래도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베이징, 상하이, 마닐라, 하노이 같은 아시아 도시들을 보며 그들의 영화에서 한국의 도시도 가끔 볼 수 있으면 하는 생각

을 한국의 관객으로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