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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eview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의 위대한 출발




개봉일 : 2000년  2월 19일


언젠가 <씨네 21>이 영화관계자를 대상으로 역대 한국영화 순위를 매긴 기획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복수 응답하는 방식이었는데 1위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었다. 이 기획에 참여한 다수

의 관계자가 1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은 작품이다. 10위권에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 유현목 감독의 <오발

탄>,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의 작품이 있었다. 이와 같은 영화들 속에서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은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살인의 추억> 이후 <괴물>과 <마더>가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하며 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누가 뭐래도 그는 현재 한국영화 최고의 감독이다.





대부분의 영화팬이 기억 못하겠지만 그런 봉준호의 데뷔작이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다. 흥행 스코어는 좋

지 못했지만 작품의 가치는 인정받았고 봉준호라는 감독의 가능성을 대중에 확인케 한 작품이었다. 영화평론

가 정성일은 봉준호의 3번째 장편 <괴물>까지 나온 시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갈수록 퇴보한다."는 평을 한 적

이 있다. 물론 그 말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이라는 작품이 좋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거다. 단지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이후의 어떤 작품보다도 훌륭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대학의 시간강사 윤주(이성재)는 교수가 될 날만을 기약없이 기다리는 남자다. 경제력 없는 남편으로 두 살 많

은 아내에게 늘 무시당하며 살아간다. 이런 이유로 민감한 윤주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짖어대는 강아지들을

잡아 화풀이한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일하는 현남(배두나)은 윤주로 인해 실종된 강아지들을 찾아다니

다가 윤주를 알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친분이 생긴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소재는 대학 시간강사의 비루한 삶이다. 영화는 돈을 줘야 대학의 교수자리를 얻을 수 있

는 현실을 비판한다. 코미디이기에 날카롭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화면들, 묘한 분위기의 몽환적인 화면들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교수자리를 원하는 자가 학장과 룸싸롱에서 폭탄주를 마시는 장면, 지하철 역에서 비틀

거리며 열차를 기다리는 장면들이 그렇다. 이 영화를 보면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 생각난다. 그 영화

에서도 주인공 시간강사가 교수직을 위해 술을 사들고 교수의 집을 찾아간다. 대사 가운데 '조니워커 블루'라

는 괜찮은 술 이름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집을 나서며 놓고 나온 우산을 교수가 흐뭇하게 펴보는 장면도 있다.

<플란다스의 개>와 <강원도의 힘> 모두 대학의 낡은 권력, '꼰대들'을 그린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는 거세된 남성이다. 힘 없는 시간강사이어서가 아니라 경제력 없는 남성이기에 그

렇다. 아내는 수시로 남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 붓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남편은 할 말이 없다. 윤주

는 잘 때 몸을 웅크리고 두 손을 모아 다리 사이에 넣는다. 무기력하고 아무런 의욕 없는 캐릭터를 그대로 보

여준다. 역시 봉테일다운 그림이다. 소설가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여성 아내가

잘 때 그와 같은 자세를 취한다. 경제력 없는 남성과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 두 가지 '상실'의 이미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시간강사들의 삶이 사회문제인 한국이기에 이 영화에서 그리는 강사의 삶, 대사들은 유난히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 초반 윤주가 선배와의 통화에서 말한다. "(힘 없이) 교수가 되는 건 하늘의 뜻이라던데.." 그 말을 듣고 선

배가 말한다. "하늘은 무슨.. 학장의 뜻이다. 임마!" 윤주의 대학원생 선후배 모임에서 한 사람이 말한다. "뚜쟁

이 신랑 리스트 순위 봤냐? 1위가 누군지 알아? 그래 1위는 의사, 변호사야. 그리고 쭉 내려가서 48위가 광부,

49위가 농부야. 그리고 50위가 인문계 대학원생이란다." 사회학을 전공한 봉준호가 만들어낸 대사이기에 특

별하게 들린다. 그냥 웃고 넘기기에 슬프고 아픈 현실이다. 





섬세한 설정과 묘사로 봉테일이란 별명을 얻은 봉준호답게 영화에는 기가 막힌 그림들이 많이 나온다. 먼저

강아지를 잃은 할머니의 무말랭이가 그렇다. 영화 초반 옥상에서 윤주를 만난 할머니가 말리던 무말랭이. 결

국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그 무말랭이를 현남에게 선물한다. 남편을 위해 뇌물을 준비해 케익 안에 넣던 아내.

케익 위의 딸기가 밑에 깔린 현금 때문에 상자의 천장에 걸린다. 그 돈은 아내의 퇴직금이다. 묘하게 서글픈

부분이다. 모든 디테일 가운데 압권은 100m 길이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도로 위에 굴리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

면 이 장면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장에게 뇌물을 건네고 폭탄주를 받아 마신 윤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참한 심정을 드러내며 괴로워한

다. 우연히 현남을 만나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지만 엉뚱한 현남은 영화 내내 그랬듯 또 한번 관객을 웃긴다.

어쨌든 윤주는 결국 원하던 바를 얻고 강단에 선다. 돈으로 사는 교수직을 뿌리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관객

이 잠시 해보기도 하지만 결론은 다르게 나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삶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라고

봉준호는 말하는 듯하다. 한국영화 대표감독 봉준호는 이렇게 주류 영화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