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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alk

한석규, 90년대 한국영화 팬들의 연인




한석규는 90년대 한국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다. 그의 영화는 9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 가운

데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어떤 평론가는 "한석규의 성공은 90년대 문화계의 미스터리"라는 표현을 하

기도 했다. 한석규의 승승장구, 데뷔작 뿐 아니라 다음 작품들이 줄기차게 흥행에 성공하고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한석규라는 배우는 정말 미스터리한 존재처럼 보였다.    



한석규는 1990년 KBS 성우 22기로 방송에 발을 디뎠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 목소리 좋다는 말을 누구보다 많

이 들은 그에게 어울리는 이력이다.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MBC로 옮겨 MBC 탤런트 공채 20기로 배우 생활

을 시작한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인 그에게 어찌보면 예정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영화

최고 배우의 연기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1994년  <서울의 달>  



처음 연기를 시작하면 누구나 대사 없는 보조출연자, 한 두 마디 대사를 하는 단역을 하는데 한석규의 시작도

마찬가지였다. 최고 스타인 그도 처음엔 사극에서 가마꾼을 하기도 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작품이 지금은 없

어진 MBC <베스트극장>에서 양정아와 함께 출연한 단막극이었다. 당시 한석규보다 이름이 있었던 양정아의

이름이 한석규보다 앞에 나오는 당연한 오프닝, 지금 생각하면 많이 어색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랬던 그를 단숨에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 MBC 드라마의 명작 <서울의 달>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대학

2년 선배인 최민식, 그리고 채시라와 호흡을 맞추며 사기꾼 제비로 살아가다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홍식

이라는 배역을 연기했고 이를 통해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다. 애초에 이 역할은 당대 최고 스타 최민수에

게 제안이 있었는데 최민수가 거절함으로 신인이나 다름 없던 한석규에게 기회가 돌아갔고 그는 그 기회를 멋

지게 살려냈다.   



                                                                                                               
                                                                                                                     1997년  <접 속>


이후 스크린으로 옮겨간 그는 이광훈 감독의 <닥터 봉>에서 김혜수와 함께 출연해 꽤 괜찮은 코미디를 만들어

내며 이 작품을 그 해 최고의 흥행작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침대>. 신현준, 심혜진과

함께 한 작품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그래픽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뒤이어 <접속>, <넘버 3>, <초록물

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 하나 같이 대중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자리잡은 흥행작이면서 90년대 한국

영화의 명작들이다. <접속>은 PC통신을 소재로 다뤘던 '감각' 멜로, <넘버 3>는 송강호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그 이름을 알린 작품, <초록물고기>는 영화를 훌륭한 정치적 도구로 만들어 내는 무결점의 시네 아티스트 이

창동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영화에서 자기만의 유일무이한 멜로 스타일을 가진 연출자 허진

호의 작품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특히 <접속>에서 만나지 못한 한석규, 심은하에 대한 캐스팅을 성사시

켜 나오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1997년  <초록물고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닥터 봉>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 한석규라는 배우는

늘 신인 감독과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것도 화제가 됐다. 배우로서 기성(스타) 감독의 명성에 기대

지 않고 신인 감독의 작품을 선택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그가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

다는 평가도 많았다. 실제로 영화는 시나리오의 예술이다. 연출과 연기가 훌륭해도 기본이 되는 시나리오가

부족하면 결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출연한 영화는 흥행 뿐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늘 호

평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보는 그의 안목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이유다.   



그는 최고 인기배우답게 광고계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는 모델이었다. 업종별로 최고의 브랜드가 그를 선택

했고 그의 얼굴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광고를 통해 대중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 영화도

TV 드라마도 하지 않으며 하다 못해 TV 인터뷰 따위도 하지 않으면서 광고에만 출연하는 그를 향해 '신비주의

냐', '돈 되는 광고만 하는거냐' 류의 비난이 거셌다. 한석규가그렇게 광고만 하면서 대중은 차츰 배우 한석규

를 잊어갔다. <쉬리> 이후 3년 만에 출연한 <이중간첩>을 대중이 외면하면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있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주홍글씨>, <그때 그사람들>, <음란서생> 등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지만 흥행은 전과 같지 않았고 대

중의 평가도 이전과 달랐다. 한석규라는 배우의 중량감은 이미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주홍글씨> 포

스터를 보고 당시 어떤 친구는 "이제 혼자로는 안 되니 여자를 셋이나 끼워넣는구나."라는 말을 했다. 그저 웃

고 넘겼지만 지금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한석규는 누가 뭐래도 90년대 한국영화 최고의 배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영화 자체도 훌륭하지만 <넘버 3>의 태주, <초록물고기>의 막둥이 같은 캐릭터는 워낙 매력적이었기에 나는

그 인물들의 대사를 줄줄 외우고 연기도 수없이 따라하곤 했다. 한석규라는 배우에 빙의해 살던 시절이다. 작

년에 <2층의 악당>이 개봉했을 때는 한석규, 김혜수의 15년 만의 결합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영화를 보러 가

기도 했다.


                                                                                                           
                                                                                                             1999년  <쉬 리>


한석규가 SBS의 새로운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을 맡아 16년 만에 브라운관으로 복귀한다. 작품

에 욕심이 나서 출연을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영화가 줄줄이 실패하는 상황에서 TV로 돌아오는 상황이기에 그

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는 왕년의 스타다. 영화를 해도 전과 같은 주목을 받지는 못

하고 최고 배우라는 타이틀도 송강호, 설경구 쪽으로 자리를 옮긴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를 사랑했던

수많은 영화팬에게 언제까지나 그는 최고의 배우다. 영화가 됐든 TV가 됐든 어디서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그의 모습을 기대한다.